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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 사랑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 2022. 3. 4. 05:32

     

    노년 자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거창한 식탁'에 나오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허구이지만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의 심정은 더 이상 나아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다. 대충 이런 얘기다.

    결혼한 세 자매를 둔 아버지가 3개월의 암 선고를 받았다. 회계사 출신으로 곳곳에 부동산을 투자하는 등 제법 재테크를 잘했던 그는 남은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고 떠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재산정리에 온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다. 세 딸에게 합리적으로 유산을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평소 그는 늘 막내딸을 걱정했다. 큰 두 딸은 능력 있는 남편과 결혼해 잘사는 반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한 막내는 늘 살기 힘들었다. 다행히 여유 있는 두 누나가 가난한 막내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부모님은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죽음에 직면한 그는 세 딸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배분하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 공평은 세 딸의 경제적 상태를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막내딸에게 더 많은 재산을 분배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이 그는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문제가 터졌다. 아버지의 재산 분배가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누나와 막내 동생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이들 사이는 남남처럼 돼 버렸다. 그래도 아버지의 재산을 더 물려받은 막내딸은 무슨 사업인가 싶더니 재산을 모두 털어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더 나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록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이의 문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가 이 모든 부모 자식간에 일어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에게 공평한 삶을 기대하는 것도 결국 아버지의 욕심 또는 지나친 기대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이의 인생이다. 부모가 된 사람은 아이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 되기 쉽고, 그리 기대되지 않는 참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조선 21대 왕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은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다. 이 사건을 정치적 당파싸움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학자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무수리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간신히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태자에게만 그런 고초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든든한 뒷바라지에 힘입어 아들이 무사히 성군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다. 영조의 생각으로는 아들 모두가 그런 우호적인 조건을 지니고 태어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왕이 되기 위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도세자는 아버지와는 다른 기질의 소유자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남자로 학문이나 정치보다는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의 모진 기대와 요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담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점점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광포한 인간이 됐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끝내 그를 뒤주에 가두고 말았다.

    역사 속의 이야기로 끝난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성격의 비극은 지금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나는 부모의 욕심이나 지나친 기대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 왔다. 가까운 친척 중에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온힘을 다한 부부가 있었다.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주말마다 아들이 입학한 서울 근교의 축구전문학원을 찾아 아들의 빈 차 모습을 지켜보고 격려하는 것이 이들의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그런 생활이 거의 6년 가까이 계속됐다. 그런데 유수의 대학 축구선수로 뽑힌 아들이 어느 날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들에게 어떤 아픔이나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는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도 가지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부부관계의 파탄만은 불가피했다. 현재 그 부부는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별거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나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로 아이가 극단적으로 선택한 이웃들도 보고 있고, 반대로 중학생 아이가 대학교수 아버지를 찔러 죽인 불륜범죄도 듣고 있다. 이 모두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한 결과다.

    그렇다면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나친 욕심 내지 과잉 기대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이성으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남' 이 두 음절 단어는 답이 있는 것 같아. 우리가 아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있다. 내 몸으로 낳는다고 아이를 남이 아닌 나와 같은 몸으로 여기지만 모든 잘못의 근원이 있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에게서 채우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설령 아이가 원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마는 어리석음까지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는 엄연히 나와 다른 사람이다. 칼릴 지브란의 다음 시처럼.

    너희들 자식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너희들 좋을 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자식들은 그대들을 통해 세상에 온 것이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그들과 함께 하되 그들은 아이들을 돌보는 관리자에 불과하며 결코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시집 예언자 중 아이에 대하여)

    아이도 이렇게 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자란 아들일까 여전히 자신과 하나의 몸, 자신과 동일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 나는 대학시절에 읽고 나서 거의 40년이 지나 다시 펴낸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사랑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공부해야 할 기술임을 강조한 프롬은 거기에 부모의 자식 사랑도 포함시켰다. 그만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쉽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부모의 자식 사랑은 적절한 시기에 모성애적 사랑에서 부성애적 사랑으로 순조롭게 이동해야 한다.

    어린 시절 모성애적 사랑이 안정되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데 필수 조건인 것처럼 이후 청소년기를 맞아 책임과 의무를 떠맡아야 하는 부성애적 사랑을 적절히 배우지 않으면 그는 건강한 성인이 되기 어렵다. 이를 반대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점차 독립된 인격체로 아이를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부부가 서로의 모성과 부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보다 넓은 시선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부모는 여기서 실패한다. 왜 그럴까? 자식을 독립된 인격, 즉 타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질문을 한다. 이 모든 우여곡절의 시기를 지나버린 지금, 어느덧 노년이 된 나는 지금 두 아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나와 내 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온화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듯이 지금 나도 두 아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가난하다거나, 부유하다거나, 상냥하다거나, 상냥하다거나 관계없이 세상의 많은 타자들을 편견 없이 대하듯, 내 아들들을 대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우리 사이를 친밀한 타인 관계라고 상상해 본다. 어쩌면 우정 관계 같은 거 그런 관계라면 아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상관없다.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한동안 자기 삶을 살기 바쁠 테니까. 세상 모든 사람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아들들이 잘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도 자신의 문제를 온갖 시련을 겪으며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이다. 거기에 어설픈 개입 같은 건 그만두자. 난 언제든지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을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 그들이 삶에 지치거나 고통을 겪고 돌아왔을 때 나는 돌아온 난봉꾼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을 환대할 것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자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나는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다음 말처럼. 내가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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